내가 본 김병관
김학준전 동아일보 회장·국립인천대 이사장
화정 김병관 명예회장의 10주기를 맞으면서 세월의 빠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동아일보사와 고려중앙학원의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하면서도 늘 웃는 얼굴로 따뜻하게 대해 주시던 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고, 또 그때로부터 벌써 10년이 지났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마저 느끼게 된다. ‘연년세세 화상사(年年歲歲 花相似)세세년년 인부동(歲歲年年 人不同)’이라는 당나라 시인 유정지(劉廷芝)의 시구가 떠오른다.나는 명예회장과 개인적 인연이 없었다. 혈연으로나 지연으로나 학연으로나, 어느 하나 이어지는 것이 없었다. 김(金)이라는 성 하나가 같을 뿐인데, 화정 회장은 울산 김씨이고 나는 경주 김씨이니 본관도 다르다. 그러한 나를 어떤 배경에서 동아일보로 불러주셨는지 지금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내가 동아일보와 공식적 인연을 맺은 때는 1998년 12월 30일이었다. 당시 인천대 총장이었던 나에게 비상근 논설고문이라는 책임을 맡겨 주셨고, 2000년 9월 5일에 인천대 총장 임기를 마치자 곧바로 부사장대우 편집 논설고문의 책임을 맡겨 주셨다. 2001년 2월 21일에는 발행인 겸 사장의 책임을 맡겨 주셨는데, 이때로부터 나는 2011년 6월 12일까지 동아일보사에서 사장, 회장, 고문으로 10년 3개월여를 봉직할 수 있었다.
사장직을 맡기시면서 우선 “신문 제작은 전적으로 발행인인 당신에게 맡기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어 “한 가지만 약속하고 다른 한가지는 유념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첫째, 사장으로 있으면서 정부나 정계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셨다. 물론 나는 그 자리에서 다짐했으며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2002년 내가 사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1년 정도 지났을 즈음 나는 새정치국민회의로부터 인천시장에 입후보해 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당연히 그 자리에서 사양했다.
둘째, 인촌기념강좌에 신경 써 달라는 말씀이셨다. 조부 인촌에 대한 화정의 애정과 존경은 대단했다. 그 애정과 존경의 표현의 하나로 인촌기념강좌에 세계적 또는 국제적 지도자를 연사로 모셔오도록 각별히 노력해 달라는 말씀이셨다. 특히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으며 소련 대통령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고르바초프를 지목하셨다.내가 노태우 대통령을 모시고 일할 때 한-소 정상회담이 세 차례나 열렸던 일을 염두에 두신 것 같았다.
고르바초프를 어떻게 초청해올 수 있을 것인가. 그를 인촌기념강좌의 연단에 세우려면 강연료와 항공료를 비롯해 상당히 많은 지출이 예상되는데, 그 비용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저리 생각하던 어느 날 한 기업인을 만날 수 있었다. 주로 러시아에서 활동을 하는 그분은 곧바로 고르바초프와 접촉한 뒤 내가 고르바초프와 안면이 있음을 증명하는 사진을 보고 싶다는 고르바초프의 메시지를 전해 왔다. 급하게 찾아보니 고르바초프와 서로 웃으면서 악수를 나눈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이 사진을 고르바초프에게 전달한 그분은 고르바초프가 만족해 하더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강연료와 항공료는 물론이고 체재비를 포함한 모든 비용을 부담해 모셔오겠다고 확약했다. 그렇다고 나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2001년 11월 19일에 고르바초프의 강연은 고려대 인촌기념강당에서 실현될 수 있었다. 청중은 인산인해 글자 그대로 많이 밀려와 강연은 성황을 이루었으며, 동아일보는 이튿날 강연 내용을 크게 보도할 수 있었다.
유엔 산하기관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무총장을 지낸 스웨덴의 한스 블릭스 박사를 초청하는 일도 쉽고 빠르게 실현됐다. 2006년 11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주한 스웨덴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블릭스 박사를 초청하고 싶다고 제의했다. 블릭스 박사는 케임브리지대에서 국제법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스톡홀름대에서 국제법 교수로 봉직하다가 스웨덴 정부에서 외교장관을 지낸 뒤 국제원자력기구의 사무총장으로 1992년 8월에 북한을 방문해 핵사찰을 실시한 인물이었다.그를 통해 그 이후 북한의 핵개발이 어느 수준으로까지 진전됐는가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대사는 반색을 하며 그가 며칠 뒤스웨덴 외교부의 파견으로 서울에 온다고 알려주며 서둘러 보자고 덧붙였다. 스웨덴 정부가 정부 예산으로 그를 서울로 보내 3, 4일에 걸쳐 비공식적 ‘현장 연구(field research)’를 하도록 결정했다는 통보가 막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2, 3일이 지나서인가, 대사는 블릭스 총장의 수락을 알려왔다. 강연료는 받지 않겠다는 뜻과 함께. 이런 과정을 거쳐 그의 강연이 2006년 11월 10일 고려대 인촌기념강당에서 열렸다. 고르바초프 때와 마찬가지로 성황을 이루었다. 물론 동아일보는 북한 핵개발 문제를 중심으로 그의 연설을 크게 보도할 수 있었다.
내가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김대중 정부에 의한 ‘세무사찰’이 진행됐고 명예회장은 어려운 일을 겪으셔야 했다. 화정 회장은 이 과정에서 나에게 한 차례도 정부와 적당히 타협하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권력과 타협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사장이 나를 살리겠다고 엉뚱한 일을 해서는 안 돼. 논조에 변화가 있어서도 안 돼. 이 일로 동아일보가 변했다는 말이 나와서도 안 돼.” 화정 회장은 정색을 하고 당부하셨다. 자신보다 동아일보사를 더 귀중하게 여기셨던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사의 장래와 관련해 밖에서는 갖가지 소문들이 나돌았다. ‘세무사찰’을 압박 수단으로 삼아 동아일보사에 온갖 압력을 가했다.
나는 이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내는 가장 쉬운 길은 타협이 아니라, 진부한 표현으로 ‘이불변(以不變) 응만변(應萬變)’이라고 생각했다.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화정 회장이 개인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감당하는 것이 화정 회장도 살리고 동아일보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것이다. 조심스럽게 그러한 취지로 말씀을 드렸더니 이미 결심을 굳힌 자세였다. 담담한 표정을 지으면서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화정 회장은 어려운 길을 택하셨다. 이 모든 과정에서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던 전현직 사원 모두에게 새삼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정말 부끄러운 사고가 2003년 7월 16일에일어났다. 조간 1면 머리기사로 당시 여권의 몇몇 유력 인사들이 부당한 돈을 받았다고 보도한 것인데, 완전한 오보였다. 나는 꼭 저녁의가판을 읽고야 귀가하는데, 전날 저녁의 가판에는 없던 기사였다. 아침에 그 기사를 처음 접한 나로서도 “이게 정확한 기사일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부리나케 출근해 편집국 분위기를 살펴보니 대부분 걱정들이었다.
결국 7월 24일자 1면에 커다란 사과 기사를 내보내야 했다. 그런데 그 7월 24일이 공교롭게도 화정 회장의 칠순 생일날이었다. 동아일보를 지극히 사랑하는 명예회장에게 별다른 선물은 하지 못하고 사과 기사, 그것도 1면을 차지한 사과 기사를 선물했으니 참으로 면목이 없었다. 책임지고 물러나겠다고 말씀드렸으나, 너그럽게 생각해주셔서 사장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고, 2004년에는 연임까지 할 수 있었다.
내가 느끼기로, 화정 회장은 반공의식 또는 좁혀 말해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이 강한 분이었다. 자신은 11세 때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했고 그때로부터 3년에 걸친 미군정 아래 감성적으로 민감한 소년 시절을 보냈는데, 그 ‘해방공간’을 특징 지은 ‘좌우익 투쟁’을 목격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행태에 깊은 불신을 키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사장으로 일하던 때 주요한 국가적 의제들 가운데 하나로 제기됐던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서도 깊이 경계하는 시각을 유지했다.그러한 시각에서 “북한의 핵개발은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과의협상을 유도하기 위해서다”라는 논리를 강하게 비판하곤 했다.
화정 회장은 기본적으로 따뜻한 품성을 지닌 분이셨다. 그러면서도 유약하지 않고 필요한 경우에는 과감한 행보를 취하면서 난관을돌파하는 분이셨다.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으로서 고려대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에서 크게 발전시키셨고, 중앙중고등학교 역시 지난날과는 크게 대비되도록 현저하게 키우셨다.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한국디지털대를 세우고 키우셔서 그 학교가 지금의 고려사이버대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닦으셨다. 이 과정에서 나에게 고려중앙학원 이사, 그리고 한국디지털대 이사장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베풀어 주셨다. 모두 분에 넘치는 배려였다.
화정 회장은 세무사찰을 계기로 동아일보사와 공식적 관계를 끊고 그 사실을 확실하게 밝힌다는 뜻에서 이웃 일민기념관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셨다. 나는 동아일보 사장이 동아일보와 공식적 관계가 없는 화정 회장을 자주 방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거의 발걸음을 끊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섭섭하다거나 서운하다는 표시를 일절 하지 않으셨다.
2007년의 어느 때인가 수술을 받으신 이후에 일민기념관으로 찾아뵈었다. 비서실에 들어서니 손(孫) 비서가 “사장님이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오전에 이발도 하시고 양복도 갈아입으셨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나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동아일보 사장직에 대한 예의의 표시라고 생각됐다. 회장님을 뵈니 내 손을 잡으며 종이를 한 장 주셨다. “사원들에게 독주는 꼭 따뜻한 물에 풀어 천천히 마시도록 해주어”라는 당부였다. 수술로 음성을 잃으셨기에 글로 대신해 주신 것으로, 술을 많이 마시는 기자들에 대한 염려의 표시였다. 이렇게 다정다감하신 분이셨구나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화정 회장은 74세에 별세하셨는데 10여 년만이라도 더 활동하셨더라면 동아일보사는 물론이고 고려대와 중앙중고등학교 모두 훨씬 더 발전했을 것이다. 무척이나 아쉽다. 새삼 고인의 명복을 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