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박기정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북5도위원회 함경북도지사
필자가 정치부장 때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당시는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씨 등이 치열하게 맞붙은 1992년 대선 와중이었다. 상당수 신문들의 선거 보도에 대해 “노골적으로 ○○○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줄서기가 너무 심하다”는 지적이 언론학자들과 정치권에서 나올 정도로 신문의 대선 보도 한줄 한줄이 민감하게 여겨지던 시기였다.작고하신 화정 김병관 전 명예회장은 당시 발행인이었다. 가끔 저녁에 필자에게 전화를 하셨다. 낙원동 해장국집에 있으니 일 끝나면 오라는 것이었다. 석간 정치부장이니, 저녁에 40판 제작을 마친 뒤 해장국집에 갔다. 김 발행인은 혼자서 해장국에 소주를 마시고 계셨다. “서민들 음식을 먹어 봐야 해”라며 소주를 잔 가득 따라서 건네주시곤 했다.
특별히 YS니 DJ니, 특정 정치인에 대해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정치부의 기사에 대한 아무런 코멘트나 의견 제시도 없었다. 다만 “요새 힘들지?” 하고 물으시면서,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불편부당 시시비비로 가야 한다”고 자답하셨다.
그러고는 인근 노래방에 가서 이남이의 ‘울고 싶어라’라는 노래를 몇 번이고 부르셨다. 그러고 나서 가회동 자택으로 모셔 드린 적이 있는데, 김 발행인은 마당에서 고개 들어 한참 밤하늘을 바라보더니 “야” 하고 고함을 치셨다.
민감한 정치적 시기에 발행인으로서 안고 있는 번뇌, 아무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었을 고민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김 발행인은 당시 한 번도 정치 기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어느 후보가 더 낫다는 식의 말씀을 하지 않았다.
필자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당시 발행인에게 안팎에서 불어오던 외풍이 얼마나 거셌을지를. 그리고 김 발행인이 그 외풍에 혼자 맞서며 동아일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심이 많았을지를.
그랬다. 우리 정치사가 질곡의 연속이었으나 그때는 참으로 민감한 시기였다. 특히 두 김 씨(김대중 김영삼)의 대결은 용호상박이었다.
당시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등의 후보가 치열하게 붙은 대선전은김영삼 후보가 우세한 가운데 진행됐다. 대부분 언론은 YS 쪽에 기울어진 보도를 하는 분위기였다.
김 발행인은 취임 일성에서 “시시비비 불편부당이 신문의 본질이다. 이걸 지키는 것이 동아일보의 정신이며 이걸 꼭 지켜야 독자로부터 존경받는다”고 밝힌 이래, 사내외에서 보이지 않게 특정 정치인이나 특정 세력 편들기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강하게 이를 물리쳤다.
92년 대선 때도 그 같은 언론 정신이 그대로 지켜졌다. 당시 상도동 측은 동아일보가 다른 신문들처럼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고, 아마 김 발행인도 그런 불만을 직간접적으로 숱하게 접했을 것이다.
어느 날 김 발행인은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현 일민미술관)에 ‘불편부당 시시비비’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을 걸게 했다. 김 발행인이 동아일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는 모든 정치세력들에 대해 대외적으로 “우린 불편부당의 언론 정신 그대로 갈 것이다”라고 공표한셈이다.
대선을 목전에 둔 1992년 12월 10일 기자협회보는 언론학회 회원들을 상대로 실시한 대선 보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주요 언론사의 후보 편향성을 조사한 결과 조선일보는 김영삼에게 유리하게 편파보도한다는 응답이 69.3% 나왔다. KBS는 김영삼 34.1%, MBC는 김영삼 30.5%, 한겨레는 김대중 편파 41.1%로 나왔다. 동아일보에 대해서는 김대중 쪽에 편파적이라는 응답이 28.2% 나왔다. 주요 언론사 중 특정 후보 편향이 30% 이하로 나온 것은 동아일보가 유일했다.
또 기자협회보가 후보 개개인에 대한 긍정적 문장 비율을 조사한 결과 동아는 김영삼 후보 긍정적 71.4%, 김대중 후보 긍정적 75%로비슷했다. 다른 신문들은 △한겨레가 김영삼 긍정적 33%, 김대중 긍정적 85% △서울신문이 김영삼 92%, 김대중 37%로 나오는 등 신문들의 후보 편향성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김 발행인은 이 같은 기자협회보 조사 결과를 보고받고는 “이런게 보도되면 한쪽에선 (동아일보에 대해) 섭섭하다고 하겠다”고 지나가듯 말씀했다. 그 어조 속엔 어려움이 있지만 불편부당의 원칙을 계속 지켜 가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냐마는, 화정 선생에게도 공(功)과 함께 과(過)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사 최고경영자로서 그의 기본정신은동아일보가 잘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확고한 신념은 누구하고 친하냐가 아니라, 동아일보가 발전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잘된다는 것이었다. 정치부장이나 편집국장 시절 김 발행인이 개인적 이해관계나 개인적 호오를 신문 발행에 개입시키는 경우를 겪은 바 없다. 그는 내가 알기에 개인 재산도 모으지 않은 분이다.
오랫동안 간부로 재직하면서 겪어온 김 발행인의 인사 스타일은능력 우선주의였다. 특정 지역에 대한 우대나 개인적 친밀도는 별로중시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후 김 발행인과 김 대통령의 만남이 있었다. 당시 차남 현철 씨의 한보 관련설이 떠돌던 시기였다. 차남을 옹호하려는 김 대통령에게 김 발행인은 “설령 현철 씨가 한보와 관련이없다 해도 국민 여론은 그렇지 않다. 처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력의 최고 절정기에 권력자의 가장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데 대해 전혀 굽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듯 기개가 있는 분이었다. 김 발행인은정치부 기자들과 소탈하게 만났다. 그는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다.게다가 워낙 신문을 꼼꼼하게 보기 때문에 정치부를 비롯한 외근 기자들에 대해서도 이름만 들으면 어떤 기사를 언제 썼는지 다 꿰뚫고있었다. 어떤 기자가 정치적으로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도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신문을 꼼꼼히 보고 빠진 기사는 지적했다. 평소 ‘구두쇠’로 알려진 김 발행인이었지만 큰 사건을 잘 처리하면 격려금을 아끼지않았다. 김 발행인이 광고 쪽을 거쳐서 편집을 잘 모른다는 선입견을가진 기자들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편집에 매우 관심이 많고 기자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기자가 큰 기사를 누락하거나 오보를 하는 등 실수를 해도 직접적으로 나무라지 않았다. 김 발행인의 기자 훈련은 때로는 술자리에서 이뤄졌다. 발행인이면서도 평기자들과 술자리를 자주 가졌고 본인이 솔선수범해서 마셨다. 부진한 기자에겐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주며 “야, 잘 좀 해”라고 한마디 툭 던지는 게 전부였다. 술자리에서의 허물이나 실수들은 다 눈감아 줬다. 불이익을 주는 경우가 없었다. 그릇이 컸다.
그렇듯 기자들과 많은 술자리를 갖고 허물없이 대해 줬던 김 발행인이지만 회사의 공적인 일에는 매우 엄중한 자세로 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가 편집국장 내정 사실을 통보 받았을 때가 생각난다.
심의실장으로 재직하던 필자는 어느 날 아침 발행인 댁에서 함께 아침 식사를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가보니 김 발행인과 사모님이 아침 이른 시간인데도 정장 차림으로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고는 근엄한 표정으로 “앞으로 편집국장을 맡아줘야겠다. 한달 간 준비를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뒤 필자의 편집국장 임명 인사가 났다.
1987년 민주화 항쟁과 대선, 92년 대선, 97년 대선에 이르기까지,정치부 데스크와 정치부장, 편집국장으로 일하던 시절 김 발행인의 존재는 큰 기둥 같은 것이었다. 발행인이 위에서 지켜주지 않으면 부장이나 국장은 일을 할 수 없다. 안팎의 외풍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화정 선생은 만 명이면 만 명이 다 생각과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는 민감한 정치적 시기에 정치나 선거에 대해 시시콜콜 누가 옳다, 누가 그르다 등의 상세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은 채, 염불처럼 ‘불편부당 시시비비’만을 강조해 줬다. 그의 그 한마디가 그 민감한 시절 동아일보를 지켜준 무게중심 그 자체였다.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말을 인향만년(人香萬年)으로 바꿔 보면 어떨지 싶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