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나카에 도시타다 中江利忠전 아사히신문 사장
“아사히신문과 동아일보는 어떤 차가운 폭풍우에도 굴하지 않는 소나무처럼 대지에 뿌리박고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함께 목탁을 두드리며 이 세상을 각성시키는 영원한 동반자가 됩시다.”1990년 4월 28일 아사히신문 도쿄 본사의 리셉션 룸. 저의 환영사에 대한 답사로 김병관 당시 동아일보 사장은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김병관 사장과 저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사장이 되었는데 제가 김병관 사장을 일본으로 초대한 행사였습니다.
그 3년 전인 1987년 11월 11일, 당시 아사히신문의 편집·국제담당 전무였던 저는 히토쓰야나기 도이치로(一柳東一郞) 사장과 함께 아사히신문사를 찾은 동아일보 권오기 주필과 양사의 ‘협력강화에 관한 각서’에 서명했습니다. 기사와 사진의 상호 전재, 공동 여론조사,문화사업과 조사연구, 기자 육성 등의 교류협력을 구체화하던 시기였습니다.
저의 방한은 1977년 편집국 차장(부국장)으로서 한국 경제의 취재단으로 갔던 게 처음이었습니다. 이후 1981년 편집국장으로서 일한신문협회 편집책임자 회의에 참가했습니다. 동아일보는 1994,1995년 두 차례에 걸쳐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견을 주선해 주었습니다. 이어 2000년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행사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2009년 권오기 씨와의 사적인 여행에 이르기까지 저는 14차례나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은 4차례에 걸친 동아일보의 초청으로 김병관 회장과 교유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억은 얼마 전미수(米壽·88세)를 넘긴 제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병관 회장은 저보다 5세 아래입니다만, “쇼와(昭和) 한 자릿수 최후의 해에 태어나 식민지 교육도 받은지라 일본은 그저 먼 나라가 아닙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와 같이 1989년에 사장직을 맡았고 저와 8개월 차이가 났을 뿐, 함께 4년간 한국과 일본의 신문협회 회장을 각기 지냈습니다. 말이 없고 올곧은 성격에 과시적 언동을 싫어하는 등 저와 공통점이 많고 죽이 잘 맞아 정말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깊고 유머감각이 풍부하셨습니다. 1990년 아사히신문 측이 마련한 연회 장소가 본사에서 가까운 일본 요리점 ‘신키라쿠(新喜樂)’로 정해지자 “양사의 관계가 보다 기쁘고(喜) 즐겁게(樂) 되도록, 보다 새롭고(新) 보다 더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협력하자”고 말씀하시거나, 동아일보 측이 답례연을 열려던 한국 요리점이 5월 연휴와 겹쳐 쉬게 돼 일본 요리점으로 변경되자 “한국식 요리의 풍류있는 대접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이기도 했습니다. 저의 가라오케 취향도 모두 파악하셔서, 제가 한국을 방문하면 반드시 가라오케를 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사랑의 미로’나 ‘친구여’ 등 한국 노래를 지금도 애창하고 있습니다.
전통을 중시하고 가족과 친족을 소중히 하는 인품은 제가 초대받았던 2003년 5월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김병관 회장은 전북 고창의 인촌 선생 고택을 비롯해 일가와 인연이 깊은 기념관 등을 둘러보는 일정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때, 온갖 박해를 뛰어넘어 민주적 사회와 국가의 완성을 향하고자 하는 동아일보의 전통에 다시금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이 ‘동아일보 역사 투어’에 앞서 그달 20일, 제가 몇 차례나 요청한 끝에 안내받은 곳이 슬픔에 휩싸여 먼저 세상을 뜬 김병관 회장의 부인 안경희 여사의 묘소였습니다. 부군인 김병관 회장과 장남 김재호 씨(현 사장)와 함께 참배했습니다. 서울의 교외,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에 자리한 묘비 앞에 서니 그로부터 6년 전인 1997년 10월 초대받았을 때의 추억이 되살아났습니다. 당시 안 여사는 함께 갔던 저의 아내 요코(洋子)에게 자택에서 직접 담근 물김치를 선물해 주시고 만드는 법까지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도 저희 집 부엌에서 사용되는 그 플라스틱 그릇을 보면 그리움이 새록새록 되살아납니다.
제가 김병관 회장 부부를 통해 한국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마도 제 뿌리인 ‘단고(丹後)’라는 지역과의 관계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991년 3월, 동아일보로부터 두 번째 초청을 받았습니다. 아사히신문 사장이 된 후로는 처음으로 초대받은 것으로 광주, 전남 목포,부산 등을 돌았을 때의 일입니다. 전남 영암군에 위치한 성기촌에서 4세기 말, 백제 왕의 명으로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왕인 박사의 생가 터와 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왕인 박사가 일본에 귀화해 오진덴노(應神天皇)의 황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일본에 한자를 보급한 큰 은인이라는 사실을 재인식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연상 작용으로 6세기 말의 한 시대를 떠올렸습니다. 오진덴노로부터 16대 뒤인 요메이덴노(用明天皇)의 아들, 쇼토쿠(聖德) 태자의 어머니 하시우도(間人) 황후는 불교를 믿는 소가시(蘇我氏)와 불교를 배척하는 모노노베우시(物部氏) 사이의 투쟁으로 당시의 수도 나라(奈良)가 어지러워지자 일본해(동해) 쪽 단고(丹後) 해안에 피란했다가 난이 가라앉은 3년 뒤에 귀경한 일이 있습니다. 당시 황후를 수행한 신분이었으면서도 현지에 남아 자손을 만들겠다고 요청해 허락받은 인물로 ‘호미노나카에마로(穂見中江麿)’라는 시종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가 나카에 집안의 선조라는 얘기가 전해온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겁니다.
제 아버지인 나카에 도시로(中江利郞)는 그 단고 해안(지금의 교탄고·京丹後)에서 태어난지라 이 설을 절반쯤 믿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라에 의해 멸망한 임나(가야) 사람들이 일본으로 망명해 나라 조정에 채용돼 있었다고 합니다. 단고반도에 예로부터 고대 조선어 지명이 있다는 방증도 있어 나카에마로도 그중 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김병관 회장이 동아와 아사히 간 기자 교류의 동아일보 측 1호로선발한 정구종 씨는 그 뒤 도쿄지사장,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을 거쳐 현재도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 동서대 석좌교수, 일본연구센터 고문으로 건투하고 있습니다. 그가 일본에 올 때마다 만나는 것도 인생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로 김병관 회장과의 추억 얘기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김병관 회장 부부의 평안한 명복과 한국의 양심의 요람 동아일보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