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이상혁변호사
화정은 내 인생에서 떼어 놓으려야 떼어 놓을 수 없는 평생의 벗이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서울 종로구 재동초등학교 4학년 시절 처음 화정을 만난 이후 60여 년을 기쁜 일, 슬픈 일 함께 나누며 지냈다. 70년이 훌쩍 넘은 먼 옛날의 일이지만, 재동초교 4학년 3반에 다닐 때 퉁퉁하고 퉁명스러운 시골 소년으로 나타난 화정의 첫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담임인 지득환 선생은 전북 고창에서 올라온 화정을 잘 보살펴 주라며 내 옆자리에 앉혔다. 한 반의 짝꿍으로 처음 그와 인연을 맺은 셈이다. 하지만 몇 달 후 화정은 조용히 사라졌다. 할아버지는 계동에 사시는데,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어딘가로 이사를 갔다는 소문만 들었다.나는 중앙학교 정문에서 5분, 창덕궁 후원 담을 넘으면 3분도 안되는 거리인 신선원전 앞쪽 원서동 14번지에서 태어나 1990년대 중반까지 살았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 뒷집에는 인촌 선생의 생부인 지산공(芝山公) 김경중 선생이 살았다. 지산공의 집은 ‘전라도 부잣집’으로 불렸다. 나는 유치원 때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동아일보와 중앙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마침 화정이 내 짝꿍이 되어 곁에 앉게 됐지만 워낙 말수가 없어 그때는 동아일보 창업자이자 당대의 거목인 인촌 김성수 선생의 장손자인 줄도 몰랐다.
당시 인촌 선생은 6·25전쟁 같은 큰 변란이 일어날 걸 예감했고 자신의 아들(일민 김상만 선생)과 장손자인 화정이 여기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전북 고창에 내려 보냈는데, 화정의 모친이 서울에서 공부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인촌 선생 몰래 화정을 서울로 보냈으나 결국은 인촌 선생에게 들켜 다시 시골로 내려간 것이었다.
화정과의 인연은 이후 60년 가까운 평생의 지기로 이어졌다. 화정은 나보다 한 살이 많았지만 죽을 때까지 나를 형이나 선생으로 대접해 줬다. 운명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화정의 이름인 ‘관(琯)’자와 내 이름인 ‘혁(赫)’자, 그리고 호인 ‘화정(化汀)’과 나의 호 ‘이산(爾山)’을 지어준 사람이 똑같은 분이다. 동관대궐(창덕궁) 앞 운니동에 살던 유명한 작명가 문관산 씨다. 파나마모자를 쓰고 다닌 할아버지로 기억이 남아있는 분인데, 우리 또래 중에는 그에게서 이름과 호를 지은 친구들이 많았다.
화정과의 기나긴 인생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가 동아일보 광고부장, 판매부장으로 경영 수업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다.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한창 활동하던 나는 1973년 일민 김상만 회장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언론과 교육의 내실화를 위해 백의종군한다는 심정으로 동아일보와 고려중앙학원의 법률고문직을 맡았다.
그때 화정은 속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없었다. 그럴 때면 나와 술잔을 기울이며 웃기도 하고 욕도 하며 마음속에 맺힌 것을 털어놨다. 판매부장을 할 때는 부하 직원들에게 밥도 사고 술도 사야 하는데 정해진 월급 말고는 돈이 없었다. 자식들을 엄격하게 키우는 인촌 가문의 전통 때문에 인촌 선생은 일민 선생을 매섭게 키웠고, 일민 선생 역시 화정에게 한 치도 빈틈없이 엄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화정은 아버지 몰래 김포에 가마니 공장과 꿩 사육장을 차렸고 여기서 번 돈으로 필요한 돈을 충당했다. 당시에는 신문을 전국 각지로 보낼 때 가마니에 싸서 발송했다. 아버지에게 손을 벌릴 수도 있었겠지만, 가마니와 꿩을 팔아 회사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돈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게 사달이 되어 화정은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했다. 논란이 일자 일민 선생은 아들에게 단단히 화가 났다. 이때 나는 일민선생을 찾아가 화정을 적극 변호했다. 아들이 부장답게 일하려면 판공비를 두둑하게 줘야 하는데 한 푼도 안 주시니 자력갱생하려고 가마니 공장을 차린 것 아니냐, 새끼줄 꼬고 가마니 짜는 일은 예전 같으면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하는 일인데 화정이 얼마나 독립심이 강한 거냐, 이것은 선생님이 잘못한 것이라고 대들었다. 그제야 일민선생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화를 풀었다. 그러면서 화정의 월급도 조금 올랐던 기억이 난다. 화정이 어떻게든 자립하려는 정신을 갖고 있던 것처럼 부인 안경희 여사도 근검한 살림으로 화정을 적극 내조했다. 화정이 늘 소탈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이런 성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화정은 겉으론 직선적인 언사 때문에 그의 품성을 잘 모르는 이들이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동아일보를 위해 고생하고 헌신했던 분들을 남몰래 챙겨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었다.
초대 동아일보 전무와 중앙학교 교장을 지낸 박용희 씨(1885~1949)라는 분이 있었다. 경기 파주 교하의 만석꾼 집안 자제로 일본 유학을 가서 도쿄 제일고, 도쿄제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경성전수학교 교수를 하다 인촌 선생과 의기투합해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중앙학교를 인수하는 데 앞장섰다. 인촌 선생의 6년 선배로 원리원칙주의자였다. 1921년 강원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 소재 임야 100만여 평을 중앙학교에 기부해 재단 설립의 기초를 놓았던 분이다. 박 선생이 기부했던 철원군의 임야는 6·25전쟁 통에 등기부가 다 타버려서 국유지로 귀속돼 있던 것을 1975년에 내가 무보수로 소송을 맡아 고려중앙학원 재단 소유로 되찾았다.
문제는 박 선생의 후손들이었다. 박 선생 일가의 재산이 대부분 이북에 있었던 바람에 후손들은 이렇다 할 재산을 챙기지 못한 채 경기의정부에서 잡화상을 하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 화정은 박 선생 후손들의 처지를 알고는 얼마간의 돈을 마련해 도움을 줬다. 화정의 부탁으로 돈 심부름을 했던 나는 동아일보와 고려중앙학원이 박 선생에게 입었던 은혜를 꼭 갚으려 한 화정의 깊은 심성을 느낄 수 있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나기 전에 문교부 장관을 했던 윤택중 씨(1913~2002)를 화정이 남모르게 도운 일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나왔던 윤택중 씨는 광복 직후 중앙학교 교사로 있었다. 인촌 선생을 흠모해 인촌의 계동 자택을 아침저녁으로 드나들면서 비서 역할을 자청했다. 인촌 선생은 자신의 인격을 대변하는 세 폭의 휘호를 남겼는데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 ‘담박명지(淡泊明志)’가 바로 그것이다. 윤택중 씨는 인촌 선생의 평생 신념이었던 ‘공선사후’가 휘호로 남게 된 것과 깊이 관련이 있는 분이다.
하루는 인촌 선생을 찾아가 두고두고 가르침이 될 만한 글을 써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생님의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공후사(營公後私)’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이를 친필로 써줄 것을 청했다. 인촌 선생은 원래는 ‘선공후사’였지만 윤택중 씨에게 앞으로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공(公)’을 더 중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윤택 중군에게/공선사후/인촌’이라고 써주었다. 흔쾌히 휘호를 써줬으나 집에 낙관이 없어 ‘김성수’라는 인감도장을 대신 찍었다. 이것이 지금 남아있는 인촌의 친필 휘호다. 나중에 윤택중 씨는 이 휘호를 동아일보에 넘겨줬다. 그런 윤택중 씨가 노후에 생활이 어렵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화정은 수백만 원을 마련해 전달해 달라고 했다. 이 돈 심부름도 역시 내가 맡았다. 윤택중 씨는 요양원에 들어가 있다가 별세했다.
화정은 엄혹했던 군사정권 시절 동아일보의 보도로 고초를 겪은 기자들을 끔찍이 아꼈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5년 8월 중공기가 전북 익산에 불시착한 사건과 관련해 당국의 보도지침을 어겼다는 이유로 편집국장과 정치부장, 기사를 썼던 기자가 남산의 안기부에 붙잡혀 가 고문과 협박을 당한 일이 있었다. 화정은 나에게 “우리 아이들이 잡혀갔는데 어떡하느냐”라며 크게 걱정했고, 이후 고초를 겪은 편집국 간부와 기자들에 대해선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1975년박정희 정권 때 대규모 해직 사태에서 기인한 동아투위 역시 화정은 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를 썼지만 결국 이루지 못한 것을 늘 애통해했다.
나는 변호사로서 공익활동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뜻을 세우고 교도소 재소자 교화 활동을 펴왔다. 재소자들이 출소해 사회에 나가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도소에 육법전서를 비치해 둬야 한다고 생각하고 10년 동안 이를 추진했으나, 1983년이 돼서야 법무부가 이를 허락했다. 재소자들이 어떤 행동이 범법행위가 되는지 알아야 출소해서도 재범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이때 화정은 나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서울구치소에 육법전서 50권을 기증했다. 당시 한 권에 3만 원이었으니, 150만 원에 달하는 것이었다. 보통은 책을 기증하면 기증자의 이름을 써넣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당시 화정도 나도 기증자를 밝히는 것이 남사스럽다고 생각해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화정이 당국의 가혹한 세무조사로 구치소 생활을 하게 됐을 때 이 육법전서를 보게 됐다고 한다. 얼마나 얄궂은 일인가.
화정은 동아일보를 조간신문으로 전환하고 광화문 새 사옥을 짓는 결단을 내리는 등 여러 가지 과단성 있는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섬세한 면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 국악을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점이다. 술을 마시다 흥이 나면 직접 흥타령을 하기도했다. 명창 안숙선을 비롯해 여러 국악인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존경했다. 어느 해 부턴가 광주의 옛 전남도청 앞 남도문화회관에서 남도국악소리 대회를 열었는데 나와 서너 번 같이 간 일도 있다. 화정이생전에 받은 유일한 훈장이 국민훈장 무궁화장(1991년)인데, 동아일보 경영자나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으로서 언론 교육 진흥이 아니라 바로 국악 진흥을 이유로 받은 것이었다.
정치권력의 횡포로 부당한 세무조사를 받게 되면서 아내인 안경희 여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화정은 국내에서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먼저 간 아내 생각에 마음이 울적할 때면 나와 함께 일본 여행을 갔고 거기에서 밤마다 통곡을 했다. 화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나는 “야, 살아있을 때 잘하지, 죽은 다음에 그러면 뭐 하냐”라고 말하곤 했지만, 화정의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오 는 슬픔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안 여사는 화정이 동아일보 경영자로 자리 잡도록 정성껏 내조를 했다. 시아버지인 일민 선생과 화정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있으면 나에게 찾아와 상의하고 중재 역할을 부탁하곤 했다. 일민 선생이 재삼재사 따져보는 신중파인 반면 화정은 과단성이 있는 행동파였다. 그런 탓에 종종 아버지에게 자기 의견을 고집하며 대들기도 했다. 부자간에 다툼이 있을 때마다 안 여사는 다음 날 새벽 바람에 내 집을 찾아와 “시아버님을 만나시면 두 사람 간의 오해를 풀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날 아니면 그 다음 날 일민 선생이 나를 부르면 나는 화정을 변호하며 일민 선생을 설득하곤 했다.
화정이 세상을 뜨기 전 가장 열정을 쏟았던 일은 고려대가 재정적으로 완전히 독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재단에 돈이 없어 직원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운영비가 없어 쩔쩔 매는 것을 보면서 화정은 이 일만큼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이뤄놓으리라 결심한 것 같았다. 그는 온갖 노력과 고생을 통해 거액의 재단 기금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았다. 민족교육에 앞장섰던 인촌 선생의 장손자로서 화정에겐 당연히 해야 할 마지막 과업이었으리라. 화정이 고려대 재단에 조성해 놓은 기금은 두고두고 후진 양성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선대에 이어 동아일보와 고려대를 이끌어야 하는 무게 때문에 화정은 늘 외로웠다. 울고 싶어도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고, 웃고 싶을 때에도 마음 놓고 웃지 못했다. 60여 년 기쁜 일, 슬픈 일, 고민하던 일을 나와 함께 나누었던 화정은 인촌의 생애와 일민의 생애를 합친 것을 살았던 친구다. 화정을 그리는 내 마음은 오늘도 울고 또 눈물을 흘린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