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장대환
장대환매경미디어그룹 회장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화정(化汀) 김병관 선생의 눈빛을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스스로를 낮춰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면서도 대화의 주제가 바뀌면 어느 순간 거침없이 소신을 밝혔다. 민주주의, 통일, 한국 사회의 문제점 등을 논할 때의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평소에는 자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지만, 업무에 들어가면 그 누구보다도 철두철미한 분이 화정 선생이었다.

반평생을 언론계에 몸담은 화정 선생은 동아일보는 물론이고 한국 언론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분이다. 1968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광고국, 판매국, 총무국 등 여러 부서에서 근무하다 민주화물결이 한창이던 1987년 발행인을 맡았다. 스스로 낮은 자세를 지켜왔던 그이기에, 특권 의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매사를 평사원의 입장에서 생각했고, 모든 구성원들을 존중하는 인품을 가진 분이었다. 그를 세간 사람들이 ‘마음이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데에는 부친인 일민(一民) 김상만 선생으로부터 받은 교육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화정 선생은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고 늘 말씀하시곤 했다.

화정 선생은 1990년 한국신문협회 회장을 맡아 4년간 한국 언론계를 대표했다.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한국신문협회장을 맡았던 화정 선생은 협회를 슬기롭게 이끌었던 분이다. 그는 어려운 시기에 언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내가 한국신문협회장에 취임했던 2005년, 신문과 나라를 위해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떠올랐던 분도 화정 선생이었다. 화정 선생은 늘 나에게 격의 없고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술도 화통하게 드셨고, 사람과의 신뢰를 중시했다.

신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화정 선생의 강조점이기에 내게는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실제 내가 한국신문협회 회장직을 맡았을 때, 회원사 간의 의견을 조정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였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시대이기에 진정성을 갖고 서로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은 지금 우리 신문 산업 발전에도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다.

화정 선생은 특히 광고주에게 신뢰를 쌓기 위한 노력을 몸소 실천했다. 광고주가 만나고 싶다면 바쁜 시간을 쪼개어 한 분 한 분을 모두 만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때로는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곤란한 입장에 처했더라도, 광고주의 상황을 헤아렸다. 그는 아무리 많은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중요한 순간 집중력을 보였고, 모든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곤 하셨다.

화정 선생의 명석함은 정평이 나 있다. 나는 선생과 자주 골프를 치면서 그 명석함을 실감했다. 그는 지혜로운 분이었다. ‘파 온’을 위해 절대 욕심을 내는 일이 없었다. 무리한 시도 대신 전략적인 접근방식을 택했다. 다이아몬드 게임을 하듯 골프를 쳤다. 자신의 비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알고, 상대방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확률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길을 미리 계산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목표에 다다랐다. 초반에는 남들보다 뒤처지더라도 마지막에는 좋은 스코어로 어느새 선두 자리에 올라 있었다.

화정 선생의 전략적 접근은 골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사람을 대하는 일, 경영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도 어김없이 나타나곤 했다.

화정 선생의 통일에 대한 열정은 내게도 깊은 영감을 주었다. 화정 선생은 1998년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김용순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기자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다. 선생은 스스로 남북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겠다고 강조했고, 북한의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다. 언론인으로서 민족과 사회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는 사재를 털어 21세기평화재단(화정평화재단의 전신)과 21세기평화연구소를 설립했다. 한반도의 번영과 평화를 위한 그의 활동은 모두의 귀감이 됐다.

시대의 변화 속도에도 뒤처지지 않았던 분이다. 언제나 새로운 것에 대해 탐구하곤 했다. 인터넷이 한국 사회를 빠르게 변화시키던 시기, 화정 선생은 뉴미디어의 흐름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가 뉴미디어 시대에 적합한 ‘정보 민주주의’의 개념을 주창했던 것 역시 이런 맥락이었다. 화정 선생은 인터넷 시대 언론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논하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바른 언론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만큼, 후손들이 건강한 사회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늘 말하곤 했다.

그는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늘 강조하셨던 분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동아일보가 지켜온 언론의 자유에도 화정선생의 이런 철학이 그대로 적용됐다고 생각한다. 그가 인생 후반에 겪어야 했던 개인적인 불행을 지켜보며 인간적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우리 사회는 언론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 이럴 때 화정 선생이 계셨더라면 시원한 답을 내놓으셨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벌써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으셨던 온화한 화정 선생의 모습이 그립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