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정구종
정구종전 동아일보 편집국장·동서대 석좌교수
동아일보는 1990년대 초 급변하는 정보화 글로벌화 시대에 부응하여 신문의 조간화, 컴퓨터제작시스템(CTS)의 도입, 인터넷 신문의 창간, 가로 편집 전환 등 미디어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을 김병관 회장이 앞장서서 구상하고 결단하여 진두지휘하면서 독려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원들이 이제는 별로 남아 있지 않을 듯하다.

1989년 4월 1일 제18대 사장에 취임한 화정은 제2의 창간을 선언했다. 김 사장은 “동아일보가 다시 부활한다”는 기치를 높이 들면서‘1등 신문’에 적합한 신문 내용의 충실화를 독려하는 한편 제작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신문 개혁에 착수했다. 당시 세계적인 정보화 혁명의 물결 속에서 신문도 컴퓨터·자동화 등 제작 시스템 개혁의 요구에 쫓기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국내 신문계는 일부 신문사의 조·석간 병행 발행 및 무한 지면 경쟁, 컬러 페이지 증면 등 과잉 경쟁 속에서 개혁을 통하여 각자의 살길을 찾아나서야 했다.

이 같은 신문계 안팎의 험난한 환경을 헤쳐 나가면서 ‘제2의 창간’을 실현해야 할 과제가 김병관 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탐사보도로 지고 새던 1989년 4월, 3년 11개월 동안의 사회부장 자리에서 해방되어 일본 게이오대의방문연구원으로서 1년의 연수 기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연수를 거의 마치고 귀국 준비를 하고 있던 1990년 4월 김병관 사장이 아사히신문사의 초청으로 도쿄에 와서 나카에 도시타다(中江利忠) 사장과 제1회 동아일보-아사히신문 사장 회담을 가졌다.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은 1987년 11월 기사 및 신문 제작 협력각서를 교환했다. 이에 따라 1988년 서울 올림픽 공동 지면 제작을 비롯해 스포츠 문화 사업 등 상호협력을 지속해 왔으며 김 사장의 제의에 따라 양사 사장 회담을 개최한 것이다. 이 회담에서 김 사장과 나카에 사장은 동아와 아사히의 상호 인적 교류 프로그램에 합의했다.

회담의 휴식시간에 김 사장은 통역을 맡고 있던 나를 복도로 불러냈다.

“자네, 아사히신문에 가서 6개월간 연수하고 오게” 하고 즉석에서인적 교류 제1호로 나를 지명하였다. 나는 “두 달 후에 게이오대 방문연구가 끝나 귀국하려 하는데요” 하면서 사장의 뜻을 살폈다. 당시의 파견 연수는 차장급 선임기자 등의 어학연수가 일반적이었고, 나는 국내 사정이 궁금해서 본사 복귀를 바라고 있었다. 김 사장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지금 국내 신문들이 조·석간 동시 발행 경쟁을 벌이고 있어. 우리도 조간으로 돌아가야 하니 아사히에 가서 조간 만드는 과정을 배워오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 사장의 말은 동아가 조간으로 발행체제를 바꾸려면 조간 만들기의 노하우가 있어야 하는데 과거 조간시대 사원들은 이미 오래전에 퇴직하였고, 국내 조간 신문사에 가서 배울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조·석간 병행 체제의 아사히신문에 가서 조간 만드는 과정을 배워 오라는 지시였다.

동아일보의 조간 전환 개혁은 김 사장의 이처럼 기발한 발상으로 시작되었다. 사내에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사히신문 파견조간 제작 매뉴얼 만들기 연수’의 아이디어였다.

속개된 회담에서 김 사장은 아사히 파견 연수의 필요성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인적 교류 파견자로 “정구종을 보내겠다”고 밝혔다. 나카에 사장은 김 사장의 조간화 매뉴얼 만들기를 위한 연수 요청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나는 일본 체류를 연장하여 7월부터 아사히신문에 파견되어 ‘조간 제작 매뉴얼 만들기’ 연수에 들어갔다.

나카에 사장은 편집국 기획보도부에 내 자리를 만들어 주고 전담부국장을 붙여서 연수 프로그램을 짜도록 한 뒤 나를 훈련시켜 주었다. 나는 6개월 동안 각 부서의 아사히 사원들과 밤낮으로 함께 생활하면서 일선의 취재 현장에서부터 아사히의 컴퓨터 제작 과정 및 신문 인쇄와 자동 발송 시스템, 새벽의 조간 배달 과정, 그리고 독자 관리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조간신문의 취재, 제작, 유통 과정을 공부했다.

이렇게 해서 그해 말까지 6개월의 연수를 마친 뒤 아사히로부터 연수 기간을 2개월 더 연장하는 허락을 받고 조간신문 제작 전 과정의 매뉴얼을 500여 쪽 2권 분량으로 작성하였다. 1991년 2월 하순,서울 본사에 가서 김 사장을 비롯한 임원 및 실국장을 대상으로 조간화 제작의 전 과정을 이틀에 걸쳐 설명했다. 나는 조간화 매뉴얼의 제일 첫 장 총괄 부분에서 “동아일보는 90년대 초 가급적 빠른 시기에 조간화를 단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병관 사장은 내가 보고한 조간화 매뉴얼을 구체화하도록 각 부서에 지시하여 조간화 준비 체제를 가동시켰고, 조간화에 대응할 인쇄 용량의 확대를 위해 윤전기를 즉시 일본에 발주하도록 하였다.

김 사장은 윤전기의 발주와 함께 컬러 인쇄 능력의 확대 및 신문발송 자동화에 이르기까지 시설본부를 진두지휘하면서 조간화 체제구축에 전력을 기울였다. 김 사장은 후발 조간화를 단행하면서, 그러나 기존의 조간신문보다 더 많은 페이지의 컬러 인쇄가 가능한 윤전기, 그리고 타사가 아직 갖추지 못한 컬러 일괄 인쇄 시스템을 갖춰보라고 이명득 시설본부장에게 지시했다. 김 사장은 일본의 윤전기 제작 공장을 직접 찾아가서 살펴보는 등 가장 효율적이면서 비용이 적게 드는 윤전 설비를 찾아다녔다. 도쿄 부근의 인쇄 시설은 물론이고 일괄 인쇄 시스템을 갖추어 제작하고 있는 센다이의 지역 신문을 방문하여 전체 인쇄 공정을 관찰해 보기도 했다.

또한 1992년 본사의 김영걸 차장 등 공무국 사원들을 동아일보가 도입할 윤전 시설과 같은 기계가 있던 아사히신문 자마(座間) 공장에 파견하여 새 윤전기의 일괄 인쇄 시스템을 연수하도록 하였다. 연수는 윤전 쇄판 전기 등 여러 팀이 몇 차례 단기 연수를 하였는데 김 사장은 일부러 일본에 와서 공무국 사원들을 저녁에 초대하여 격려하기도 했다.

모든 사원들이 새로운 조간신문 제작 및 유통 시스템을 치밀하게 준비해 오던 끝에 김 사장이 조간화 전환을 결단한 지 3년 만인 1993년 4월 1일 동아일보는 창간 73주년 기념일에 전격적으로 조간화 발행을 단행해 ‘아침 신문’의 시대를 열었다.

동아일보의 조간화 전환은 아사히 모델 연수에서부터 인쇄 시설확충의 투자 결정 등 추진 과정 및 정착까지, 미디어 환경 변화에 적극 대응한 화정의 혜안과 뚝심으로 실현된 대개혁이다. 윤전기 발주와 발송 시스템 자동화 등 실무를 맡았던 이명득 시설본부장은 “동아일보가 적시적기에 제작 방법의 세대교체와 시설의 개혁을 이룰 수있었던 것은 김병관 사장의 강력한 의지 덕분”이라고 회상한다.

동아일보가 조간화를 단행하고 32면 가운데 16면의 컬러 일괄 인쇄 시스템을 갖춘 1993년, 국내 경제가 활성화하였고, 대기업의 컬러광고 수주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컬러 인쇄 시설의 확충과 광고 물량의 확대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동아일보는 조간화 6개월만에 200만 부를 넘어섰고 광고 게재 의뢰도 30% 이상 증가했다.

화정은 조간화 성공과 함께 1993년 4월 회장으로 취임한 후에도 전국 동시 인쇄 체제 확립과 신문 제작의 컴퓨터화, 곧 CTS의 전면 시행을 독려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정보화 자동화 시대에 맞춰 신문은 제작 시스템의 현대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일본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이미 CTS를 확립하고 있었다.

화정은 권오기 사장으로 하여금 DTS본부를 설치하여 CTS 기종의 선정과 도입 등을 검토하도록 했다. 당시 국내 신문사 가운데 조선일보는 IBM을, 중앙일보는 도시바의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었다.

나는 조간화 매뉴얼 보고 후에 도쿄지사장으로 현지 발령을 받고 도쿄지사의 경영과 칼럼 집필에 전념하는 한편으로 신문 제작 현대화의 후속 작업을 지원하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나에게 일본 각 사 CTS의 장단점을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다시 아사히신문에 가서 CTS 담당 임원 등에게 부탁하여 작성한 일본 신문 CTS 비교 분석 리포트를 본사에 보고하였다. 본사에서는 권오기 사장과 DTS본부의 김광희 이사, 이용성 국장 등이 국내 신문사의 CTS 기종 평가 작업을 벌였다. IBM은 가격이 비쌀 뿐 아니라 제어 시스템이 영어로 되어 있고 뒤따르는 연수 및 AS 등의 문턱이 높았다. 검토 결과 도시바와 삼성이 공동 개발한 CTS가 가격 및 AS 면에서 우수하고 한국어 명령어체계 등 접근성이 쉽다는 결론이 났다.

권 사장과 DTS본부는 삼성-도시바 시스템 도입이 유리하다고 김회장에게 건의했다. 화정은 삼성이 공동 개발한 점을 미덥지 않게 생각하고 이용성 국장에게 현장 출장을 지시했다. 이 국장은 일본의 도시바 CTS를 운영하고 있는 니가타신문 등 현장을 찾아갔다. 그리고IBM에 대한 대외비 평가서를 입수하여 도시바가 더 앞서 있는 체계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여 김 회장을 설득했다.

화정은 CTS 마지막 선정 과정까지 신중을 기하여 권 사장과 이 국장을 다시 일본에 보내서 도시바와 접촉하게 하였다. 역시 도시바의우위와 도입의 불가피성으로 결론이 났다. 보고를 받은 화정은 삼성-도시바의 CTS로 최종 결정하고 그 대신 CTS의 도입과 운영 및 AS에투입되는 모든 비용을 삼성 관련 금융사가 최저 이자로 융자해 주는 조건으로 도입을 승인했다. 그리고 삼성SDS의 전문 기술진을 충정로사옥에 입주시켜 동아일보의 CTS 전산화 구축을 책임지도록 했다.

동아일보는 1994년 4월 1일 창간 74주년 기념호부터 CTS 전면시행의 신문 제작에 돌입했다. 창간 이래 신문 제작을 지켜 왔던 종이 원고지와 납활자는 역사의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1989년 화정이 사장 취임 이래 독려해 오던 컴퓨터 자동 제작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옛 공무국 출신 중 제작국으로 업무 전환한 사원들은 작업복 대신 넥타이를 매고 컴퓨터 앞에서 일하게 되었다.

화정이 동아일보 사장과 회장으로 있던 1989년부터 2000년까지의 11년간은 세계의 신문들이 제작 기술의 진보와 뉴미디어 시대를 맞아서 끊임없이 도전받던 시기였다. 신문의 콘텐츠와 뉴스 발신 수단의 자기 혁신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긴박한 시대가 계속되었다.그 같은 미래를 향한 혁신의 웨이브 속에서 구미의 신문사들이 개발에 착수한 것이 전자 신문, 오늘날의 이른바 인터넷 신문이다.

일본 신문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 컴퓨터 제작 방식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종이 신문의 다음 단계로서 전자 신문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컴퓨터 제작 시스템 및 기사 DB화에 막대한 투자를 하여 특정 계약 독자, 주로 기업들에 기사를 컴퓨터를 통해 판매하는 ‘닛케이 텔레콤’을 일본 신문 가운데 처음으로 서비스하고 있었다.

이 같은 움직임을 정리하여 김병관 회장에게 보고하고 동아일보도 전자 신문 개발 및 서비스에 착수할 것을 건의했다. 국내 주요 신문들도 전자 신문 도입에 관심을 두던 때였다. 김 회장은 이 같은 정보화 시대 새 매체 개발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자 전자 신문 구축 시스템을 미국에 발주하였다. 그 결과 1996년 6월 인터넷 전자신문인 마이다스(MIDAS : Multimedia Information from the Dong-A IlboSyndicate)를 서비스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9월 뉴미디어 전문법인인 ㈜마이다스 동아일보를 설립했다. 마이다스 동아일보가 오늘날의동아닷컴이 되었다.

내가 2001년 8월 동아닷컴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나의 제안과 본사에서의 연구 검토를 통하여 설립된 동아닷컴이었기에 그 경영을 직접 맡아 보라는 김병관 회장의 배려 덕분이었다.

1997년 2월 편집국장에 임명된 나에게 회사와 기자들은 지면의혁신과 함께 신문 제작 시스템의 개혁을 주문했다. 1997년은 12월에대통령선거가 예정되어 있어서 어느 해보다 신문 보도의 공정성, 객관성이 요청되던 때였다.

김 회장은 대선에 임하는 동아의 보도 자세에 대해 “끝까지 중립을 지킨다”는 기본 원칙을 강조하고 공정한 지면 제작을 여러 차례 주문하였다. 대통령선거 때마다 여당 후보가 누리던 ‘집권당 프리미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화정의 의지였다.

그해 여름 김 회장은 나에게 ‘가로쓰기 지면 시안’을 만들어 보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동아, 조선은 재래의 세로 편집 체제였다. 그러나 교과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출판물에 가로쓰기 체제가 확대되었고, 동아일보도 수년 전부터 스포츠면 등 일부 지면의 가로쓰기 편집이 실험적으로 실행되고 있었다.

“그동안에 편집국에서 가로쓰기 지면 시안이 보고되었지만 불안정하다는 평가일세. 제대로 된 시안을 만들어 보게.”

김 회장의 이 같은 지시를 받고 나는 편집국 내에 태스크포스를 극비리에 만들어 가로쓰기 지면 시안 만들기에 전념하도록 했다. 뉴욕특파원 출신의 김차웅 부국장에게 “자네, 뉴욕타임스(NYT) 많이 보았지. NYT를 모델로 해서 가로 편집 지면을 개발해 보게” 하고 부탁하고 사내에 별도의 방을 차려주면서 그에게 전권을 맡겼다. 김차웅 부국장을 팀장으로 베테랑 편집부 기자 2명, 지면 디자이너 등이한 팀이 된 태스크포스가 가로 편집 테스트 지면을 만들기를 수십 번. 수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이 정도면…” 하는 시안이 나왔다.

나는 편집국 부장 회의에서 최종 확정한 이 테스트 지면을 김 회장에게 보고하였다. 김 회장은 이 가로쓰기 지면 시안을 동아일보 이사회에 보고하라고 지시하였고 이사회의 승인을 얻어 동아일보는1998년 1월 1일자로 전면 가로쓰기를 단행했다.

편집국에서는 제호도 한글로 가자는 제안이 일부 있었으나 ‘東亞日報’의 한자 제호는 고유명사인 데다 전통적 이미지를 살려야 한다는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그대로 존속되었다.

동아일보는 화정의 사장 및 회장 재임 중에 정보화 글로벌화의 물결 속에 조간화, CTS, 인터넷 신문, 가로쓰기 등 새로운 미디어 시대가 요구하는 신문 개혁을 단행하였다. 화정은 그 같은 미디어 개혁에 앞장서서 사원들을 독려하면서 동아일보 제작 시스템의 현대화를 이룩했다. 신문 개혁의 중심에는 언제나 화정이 있었다. 화정은 시대의흐름에 부응하는 미디어 개혁의 발상과 결단, 그리고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동아일보 창간 이래 가장 중요한 변화를 이끌어 냈다.

내가 가까이서 모신 화정은 하루 24시간 누구보다도 신문만 생각하는 ‘돌쇠’였다. 가끔 집무실에 가 보면 책상 위에 발을 걸친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을 대하곤 했다. ‘신문 생각’이었다. 회사 내외의 인사들과 술자리를 만들 때도, 식사 자리에 초청할 때도 반드시 어떤 목적의식을 갖고 임했다. 동아일보를 지키기 위한 화정의 노심초사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화정은 그처럼 동아를 위해 큰일을 이루고 간 ‘영원한 신문인’이다. 목록